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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유럽여행 19 피렌체 곱창 버거와 산 로렌초 성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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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유럽여행 19 피렌체 곱창 버거와 산 로렌초 성당

사용자 민희토크
1.

피렌체 대성당에서 골목을 따라 북서쪽으로 조금 이동했다.







뭔가를 먹고 싶어서 움직인 거였는데 가죽제품을 파는 노점상이 잔뜩 나왔다. 아마도 이곳이 가죽 시장으로 유명한 산 로렌초 시장Mercato di San Lorenzo인가 보다.

평소 같으면 느긋한 마음으로 구경했겠지만, 배고픈 내게 가죽제품이란 먹지도 못하는 비싼 녀석들일 뿐이었다. 나는 짙은 가죽 냄새에 어지러워하다가, 시장 안쪽에 숙소 주인인 나디나가 알려준 곱창 버거집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곱창이라면 또 좋아라해서, 거길 가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가죽 시장 안쪽의 곱창 집이라니, 정말 가축의 모든 것을 다 이용하는 동네구나.





2.

이곳이 곱창 버거로 유명하다는 Da Nerbone.





처음에는 이 집의 인기 메뉴인 곱창 버거를 먹으려 했으나, 주문을 하기 전, 이탈리아인들이 버거가 아닌 그릇에 담긴 무언가를 먹고 있는 걸 발견했다. 직원에게 저 사람들이 먹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 양념된 곱창만 따로 담은 것이란다. 곱창 버거는 4유로고, 저 곱창은 7유로라고.

버거보다는 곱창만 따로 먹는게 더 괜찮을 것 같아 7유로짜리 곱창으로 시켰다.

주문을 하고 자리로 돌아가 멍 때리며 앉아있는데, 아까 내 주문을 받았던 직원이 소리치며 날 불렀다. 뭔 일인가 하고 바라보자, 내 지갑을 손에 들고 팔을 휘젓는 직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앗, 내 지갑!

그는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며 날 타박했고, 난 곱창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그랬다며 곱창을 탓하곤 고맙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탈리아 와서 두 번째나 카운터에 지갑을 두고 왔다. 이것 참. 하인리히는 한 건의 중대한 인명 사고가 일어나기까지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발생한다고 했는데. 나도 29번의 덤벙거림을 쌓아가다보면 한 건의 중대한 도난 사고를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르겠군. 조심해야겠다.





지갑과 여권, 카메라 등을 잘 갈무리하고 조금 기다렸더니, 기대하고 고대하던 곱창이 나왔다.





별점을 매긴다면... 별 세 개 반 정도?

눅눅하고 부드럽게 삶아진 곱창은 몹시 내 취향이었다. 난 질긴 걸 싫어해서 푹 익은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짝 비릿한 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 양념만으론 비릿함을 완벽하게 못 잡나보군. 그래도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양념된 곱창 옆에는 매운 소스가 뿌려져있어서 취향껏 섞어먹으면 됐다. 빵은 약간 퍽퍽했지만 곱창 기름을 묻혀 촉촉하게 먹었더니 괜찮았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음식의 온도였다. 곱창은 미지근했고, 그 온도는 '팔팔 끓는 뜨거운 음식'을 주로 먹는 한국인의 기준에선 터무니없는 온기였다. 뜨거워서 김이 모락모락했다면 더 맛있었을텐데, 어째 이리 미적지근하단 말인가. 대부분의 음식은 뜨거우면 맛있단 말이다. 그 점이 참 아쉬웠다.





3.

생각보다 양이 많아 당황스러웠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침착하게 곱창을 해치운 뒤, 산 로렌초 시장 밖으로 나왔다.

아깐 배가 고파서 그냥 지나쳤지만, 피렌체 대성당과 산 로렌초 시장 동선 상에는 큰 성당 하나가 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의 전용 성당이었던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이다.

피렌체 대성당 급의 으리으리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당이니까 안에 촛불 봉헌하는 곳이 있을테고, 그렇다면 계획했던 대로 생일 기념 촛불을 켤 수 있을테다. 나는 산 로렌초 성당을 향해 쫄래쫄래 걸어갔다. 시장에서 단 3분 거리였다.





산 로렌초 성당의 볼품없는 외벽(파사드).

사실 이렇게 볼품없을 성당은 아니었다. 그야 이 성당은 메디치 가의 본당이었으니까.

이 성당의 외벽 디자인 설계를 맡았던 것은, 메디치 가의 후원을 받았던 미켈란젤로였다. 원래 산 로렌초 성당은 그 천재의 설계안대로 어떤 대성당과도 견줄 만한 번쩍번쩍한 대리석 장식이 추가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재료의 어려운 공급과 기술적인 문제, 금전적인 문제 등의 복합적인 사정으로 그 설계안은 취소됐고, 결국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지금까지 미완성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 설계대로 진행됐더라면 지금쯤 이 성당은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닿은 아름답고 고고한 성당으로 유명세를 떨쳤을 것이고, 근처의 피렌체 대성당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런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다. 아쉽기 그지없다.

그 아쉬움은 피렌체 시민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는지, 몇 년 전부터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성당의 외관을 복원할까 말까에 관한 토론이 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저래 남아있는 걸 보면 쉽게 진행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초라한 외벽 때문인지, 산 로렌초 성당의 근처엔 관광객도 얼마 없었다. 여기서 불과 200m 떨어진 피렌체 대성당의 북적거림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뭐야, 이 취급... 같은 성당인데 괜히 슬프잖아...





4.

괜스레 안쓰러운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앞에서 입장료를 받았다.





이런 외벽에 입장료까지 받다니 사람이 없을만 하군.

가벼운 동정은 무료일 때까지다. 나는 뚱한 얼굴로 돈을 지불했다. 입장료는 5유로.





입장권은 성당 옆의 메디체아 라우렌치아나 도서관까지 포함한다. 성당 가기 전에 거길 먼저 가봤다.

내부는 전시실로 쓰고 있었는데, 전시품에 관심이 없어서 대충 보다 나왔다. 오히려 외부인 안뜰이 마음에 들더라. 정원 가운데의 오렌지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조용하니 거닐기에도 좋았다.





이런 곳에서 또 사진을 안 남길 수 없지.

겁나 후리한 척 자유로운 영혼인 척 다른 사람이 찍어준 척 포즈 잡고 다리 모양도 계산해서 찍었다.





도서관 밖으로 나와 메인인 성당 내부로 들어왔다.

성당은 전반적으로 거대하고 웅장했다. 내부는 외벽과는 다르게 조각이나 그림, 천장화 등의 여러 장식들이 있었는데, 그 덕분에 볼 만했다.







다리를 천천히 움직이며 성당을 구석구석 구경했다.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 중엔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도 있다고 들었는데, 뭔가 푯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러보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라 어떤 게 그 천재의 작품인지 모르겠더라. 그런 걸 판별하기엔 내가 너무 막눈이었고, 그래서 그냥 모르는 채로 쭉 둘러보며 감상했다.





5.

구경을 마친 뒤, 마침내 촛불 봉헌대 앞에 섰다. 오늘 나는 순전히 이걸 위해 피렌체에 온 거다.





봉헌대에 올라가있는 촛불들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았다. 관광객들을 비롯해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겠지. 이 쪽에서 일하는 천사들은 한가할 것 같다. 왠지 한가한 주민센터에 민원을 넣는 기분이다.

나는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헌금함에 소액의 돈을 넣고, 초를 가져와 불을 붙였다. 처음 해보는 거라 서툴렀지만 그래봤자 초를 켜는 일이었기에 훌륭하게 잘 켰다. 촛불을 훌륭하게 잘 켰다니 써놓고 보니 이게 자랑할 만한 일인가 싶지만.





이게 내 촛불.

나는 조금 뻘쭘한 마음으로 촛불 앞에 섰다. 상상 속에선 이 일이 엄청 멋있고 그럴듯해 보였는데, 막상 하니까 괜히 어색했다. 왠지 주변 사람들이 날 쳐다보는 것 같잖아. 난 천주교 신자도 아닌데, 함부로 불 붙여도 되나. 혹시 내가 뭐 실수한 건 아닌가. 이렇게 불 붙이는 게 아닌가. 등등.

어색한 몸짓으로 끼긱거리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내 예상과 다르게 그 어떤 사람들도 내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괜한 착각이었군. 그렇다면 이제... 뭐... 어... 기도라도 할까? 그래, 모처럼 생일이니까 축하해달라고 기도해야겠다. 선물 좀 달라고, 이왕 주실 거 로또 1등 번호 같은 걸 주셔도 된다고 기도해야겠다. 나는 내 세속적인 열망들을 머릿속에서 잔뜩 끄집어내곤 한참 동안 징징거릴 준비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입에서 흘러나온 기도는 마음 먹은 내용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 때 왜 갑자기 뭔가 초연해져서 그런 기도를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입으로 뱉고 보니, 나 자신이 삶의 많은 것들에 의연하며 관대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거 좀 멋있는데? 그래서 그 멋있음을 스스로 파괴하는 로또 1등 번호 따위를 기도할 수 없었다. 그래, 폼 안나게 로또가 뭐냐, 로또가. 감사할 줄 아는, 좀 더 멋있는 어른이 되자!

...정말인지 마음가짐이란 참 중요한 것이다. 감사해하면 감사할 만한 일이 생긴다. 물론 그런 걸 계산해서 감사하다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날 밤, 나는 피렌체에서 많은 감사함을 얻었다. 그건 여러 개의 불운처럼 보이는 우연이 모여 만들어낸 선물이었다.

어쨌든 그건 조금 나중 얘기다. 당시의 나는 아무 생각없이 눈을 꿈뻑거리며 초가 타는 모습을 보다가, 실없이 웃곤 성당에서 나왔다.



저녁의 피렌체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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